-------------------------------------------------------------------------------- 만인의 총 -------------------------------------------------------------------------------- ▶ 만인의총은 정유재란(1597년)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 관, 군 1만여 의사들의 호국의 얼이 서려있는 성스러운 곳이다.
▶ 임진왜란(1592년)때 호남을 범하지 못하여 승전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왜적은 1597년 11만 대군으로 다시 침략의 마수를 뻗쳐 전라도를 침공키 위하여 적의 우군은 전주성을, 좌군과 수군 5만 6천명은 남원성을 공략하였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1천여의 군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였다.
▶ 적은 8월 12일 남원에 당도하여 성을 겹겹이 포위하였으며 13일부터 16일밤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주민 6천여명을 포함한 1만여 의사들은 혈전분투하다가 장열하게 모두 순절하였다.
▶전쟁이 끝난뒤 피난에서 돌아온 성민들이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1612년(광해4년) 충렬사를 건립, 전라병사 이복남 등 8충신을 모셨으며, 1653년(효종4년)에는 충열의 사액이 있었고 1675년(숙종원년)에 남원역뒤 동충동으로 이건한 후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에 들러 허술한 묘역을 보고 이장을 검토하도록 하여 1964년 남원 시 군민들이 현위치에 이전하였다. 사적 제 102호였던 이곳은 이전으로 해제되고 지금은 사적 제 272호로 지정되어 있다.
▶ 만인의총의 정화사업은 1974년부터 호국선현 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정부의 지원과 전도민의 정성어린 헌수로 1979년 정화를 마치고 충열사에는 50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만인의총에서는 매년 9월 26일에 만의의사 순의 제향을 드리고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 왜군의 남원성 공략 작전도 이 작전도는 정유재란 당시(1597) 남원성 전투에 참가했던 왜병 가와가미 후사구니가 그렸던 것으로 그간 일본 가고시마겐 도서관에 묻혀있던 것을 최근 정유재란시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 장군의 11대손인 이가정문(일본거주, 문학박사:정유재란시 왜군이 볼모로 데려갔던 이복남 장군의 셋째아들 이성현이 가문의 뿌리를 찾기 위해 60여년간의 노력으로 찾아낸 자료다.
▶ 아군의 병사행차 위용 -1597년(선조 30년) 8월 12일 전화 연염이 하늘을 덥고 전운이 깊어지자 전라병사 이복남은 조방장 김경노와 교룡산성 별장 신호등의 장수와 임사미등의 장수 50여명를 포함한 수백명의 병력만을 거느리고 적이 이미 성밑을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를 병사행차의 위용을 갖추고 이병사는 유연히 마상에 앉아 남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가고 이있다.
▶ 적의 공격과 아군의 반격 -1597년 8월 14일 전황 작전 2일째 8월 14일 적이 계속 공세를 취하여 오니 성의 동남쪽을 지키던 수병이 많이 전사하게 되었다. 12시경 적이 총과 포를 쏘면서 돌진하여 오니 그 소리가 뇌성벽력같고 총탄이 우박 치는 듯하니 이복남, 신호, 김경노 등은 곧 병력 천여명을 이끌고 성문을 열어 제치고 나각을 불며 초요기를 흔들면서 진격하니 그 함성은 하늘을 찌르는 듯 하였다.
▶ 적의 협상요구를 거절하는 아군 -1597년 8월 15일 왜구의 군사 5명이 양원에게 뵙기를 청하니 양원은 용성관 자기처소에 들어오게 하고 적장의 전황을 전달받은 양원은 내가 천하를 횡횅하였으며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전쟁이라곤 없었다고 하면서 기세 당당하니 적병사는 남문으로 돌아 갔다.
▶ 아군의 최후전투 상황 -1597년 8월 16일 작전 구례현감 이원춘은 흑각 별장궁을 휘어서 십발 개중으로 쏘아 죽였는데 덤벼드는 적과 싸우는 광경을 바라보던 부하 군사들은 적중으로 뛰어들어가 장렬하게 싸웠으며 나이어린 손공생도 인궤를 끝까지 간직하고 이현감의 뒤를 따라 최후 일각까지 분절하다가 순절하였다.
이 노래는 고려말부터 조선중엽까지 우리 조상들이 즐겨 불렀던 축가 [오늘이오늘이소서] 이다. 특히 소박한 평민들이 생활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며 남원에서 채보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노래이다. 오늘날 노래 [아리랑]이 우리 민족의 노래로서 국민모두가 애창 하듯이 우리 옛선조들도 심방곡 [오늘이 오늘이소서]를 애창하였다.
그러나 임진.정유재란을 당하면서 노래도 잃어가고 아는 이도 사라져갔다. 다행히도 1610년 남원에 살았던 양덕수가 사라져가는 노래들을 채보하여 양금신보를 만들었으니 남원의 문화적 위상을 드높인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정유재란때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구는 우리 조상들의 귀와 코를 베어 그들의 전공을 다투었고 풍신수길은 남원에서 베어간 코 421수를 잘 받았다는 영수증을 발행했으며 포로를 노예로 파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남원의 수 많은 문화재와 사기장(도공)을 납치해 갔는데 이때 일본으로 끌려간 사기장들은 고국에서 불렀던 노래 [오늘이 오늘이소서]를 망향의 노래로 불러 400여년 이 지난 오늘까지 그들이 잡혀가 살고있는 일본 나에시로가와에는 고국이 그리워 단군단을 만들고 망향의 한을 달랬던 옥산궁이 있다. 해마다 음력 9월 14일이 되면 큰제사를 올리는데 이때 부르는 노래가 심방곡[오늘이 오늘이소서]이며 우리 음 그대로 부른다.
1988년 7월 26일 광한루원 완월정에서는 이들 사기장의 후예들에 의해서 그들이 부르던 노래 [오늘이 오늘이소서] 귀향 음학회를 가졌으며 노래의 원 고향인 남원에 다시 돌려주는 전수식을 가진바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노래[오늘이 오늘이소서]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재조명하고 남원의 문화적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남원문화원에서 1994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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